Duncan Hannah
"내 작업은 어린 시절 했던 낭만적인 상상들에서 옵니다. 감명 깊게 본 책이나 영화 속의 사람들과 장소를 재현해보려고 그림을 그렸죠. 나이가 들고 회화와 그 작업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나의 이러한 욕구가 평생 지속할 수 있는 작업의 틀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제가 그리는 그림들은 각각 그 자체로 자족적인 존재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어린 시절부터 나를 지배해 온, 한나의 커다란 허구의 세계를 이룹니다."
덩컨 한나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태어난 덩컨 한나는 주로 영국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다. 그의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는 20세기 중반 영화와 문학에서 비롯된다. 영국의 시골 어딘가에 서 있는 소년, 런던의 어느 골목에 세워진 시트로엥,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에서 떠올렸을 만한 여자, 누군가를 태우고 몬테카를로를 떠나는 배….
한나가 바드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는 팝아트와 개념미술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단순함과 낭만적 정서가 지배하는 이상적인 시절에 관심을 가졌다. 그 시절은 실제로 이제는 잊혔거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과 장소로 구성된다. 한나의 세계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의 허구적 속삭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보는 순간 오래전 그림인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래서 감상에 젖게 할 법도 하지만, 꽤 훌륭한 와인처럼 '크리스피'하고 '드라이'하다. 덩컨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꽤 직설적으로 그리는 편이다."라고 한다. 낭만적인 색채를 띠지만 감상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시선이지만 질척거리지 않는…. 한나의 그림은 잘 쓰인 한 편의 소설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언제이든, 그 이야기가 현재형으로 우리에게 어필하듯 한나의 '과거형' 그림들 역시 우리에게 현재형으로 다가온다. 그의 그림 속에는 기대와 욕망과 두려움과 불안과 슬픔과 공허….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며 겪게 되는, 모든 내면의 사건들의 가능성이 담겨있다. 다만 한나는 지금이 아닌 과거,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곳이라는 상황을 설정하며 적절한 거리를 안겨 준다. 그의 그림들 앞에서 우리는 그 거리를 확보하고, 현실 속 욕망과 불안과 슬픔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혹함은 제거된다. 그 가혹함이 제거된 자리에 적절한 부드러움이, 아름다움이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던컨 한나는 1952년 미국에서 태어났고, 현재 뉴욕에서 활동 중이다. 1981년 데뷔 이래 미국과 영국에서 50여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한나의 그림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시카고 예술대학교, 믹 재거 개인 컬렉션 등 여러 미술관 및 개인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2011년 구겐하임 펠로우십에 선정되었다.